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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플래너를 위한 교육. 파티의 정의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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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한국에서 경험해본 수 많은 이들의 미래에 대한 판타지는 가히 안타깝고 한심할 정도로 느껴지는 부분이 너무 많이 애석하다. 자신들이 갖고자하는 직업에 대한 정확한 지식도 없고, 그렇다한들 이를 깨우치고 성장하려는 노력도 부재하다. 만약 자신들의 부족함을 느끼고 이를 벗어나고나 노력이라도 한다면 나은 길을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에 대한 개선가능한 점은 상당히 부족하게만 느껴진다.

 

지금은 파티플래너에 대한 직업자체가 사실상 크게 무산된 안타까운 직군 중 하나이며, 한다 하더라도 대부분 코로나19를 대비한 비대면의 방법들을 찾아 적용함으로써 이 또한 트렌드에 변화되어 일부 직군에 한정된 수익창출이 가능한 실정이다. 무엇보다도 해당 업계의 가장 답답하고 한심한 부분은 '한국은 특히 제한되고 한정된 인식'으로 편향된 시각에 의한 결과물만 받게되는 사례들이 상당히 많다라는 점이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이나 뒤로 돌려막기와 같은 옛것에 의한 전통이 아직도 존재한다.

 

흔히 무능력한 꼰대들이 많은 업계가 바로 한국의 파티플래너이다.

이를테면 '기획/제안'에 대한 정확힌 개념을 모르는 대표와 임원에서부터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이들까지 한국의 미래가 참으로 안타까운 업종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는 필시 업계의 문제라기보다는 국가 전체에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는 개개인 가진 윤리의식과 가치관의 인식자체가 바이러스에 감연된 듯한 모습으로 보여졌다.

 

1. 파티의 정의

'Party'의 어원은 '부분으로 나누다'라는 중세어 'partie'에서 유래되었는데, 한 무리, 한 편이란 뜻에서 '모임'이나 '정당'의 뜻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결국파티란 같은 목적을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고대에는 '눈을 크게 뜨다'. '깜짝 놀라게 하다'라는 의미인 향연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다.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시대에서부터 왕족과 귀족들이 향연의 중심인물이었고, 그에 걸맞은 성대하고 극적인 요소의 파티 연출이 필요하였다.

 

오늘날 문화적 가치 창출은 물론 사회적, 경제적 가치 창출에도 효과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파티플래닝이다. 이는 결국 파티 참가객들이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뿐만 아니라 빛, 소리, 공간, 음악 등이 함께 어우러지는 이벤트의 연출까지 기대할 수 있도록 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2. 파티의 역사

우리나라 파티의 역사가 서양에 비하여 짧은 것은 아니지만, 현재 쓰는 파티의의미는 대게 서양에 준하여 그 기준이나 형식을 모방하고 있다. 따라서 서양 파티의 역사는 그리스시대부터 자세히 서술하고, 우리나라 파티의 역사는 요약하여 정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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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양

(1) 그리스시대 (BC 2000-AD 30)

호머시대의 그리스인들은 앉아서 식사했지만, 이후 아테네인들은 바빌로니아인들이 기원전 7세기경에 했던 대로 옆으로 누워 식사하였다. 클라네는 잠잘 때와 식하할 때 모두 사용되었는데, 경사를 없애고 동물의 다리 모양을 받침으로 사용하였으며, 소용돌이 문양으로 머리 부분을 장식하였다. 클리네 침대 밑에는 보조탁자인 트라페자를 두어 식사 때 옆에 놓고 사용하였다.

 

그리스시대의 향연은 개인집에서 열렸는데, 손님을 접대하기 위하여 고용된 일부 여자를 제외하곤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손님은 집에 도착하면 우선 신발을 벗었다. 이 시대의 그림에서 침상아래 신발이 놓여 있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다. 노예들은 손님의 발을 닦고, 식사 전에 손 씻을 물이 담긴 그릇을 준비한다. 손님들이 손을 씻고 나면 기댈 수 있는 베개가 놓여진 1-2인용의 침상으로 안내된다. 그 옆에는 음식이 놓인 낮은 탁상이 있다. 그리스시대에는 포도주를 물과 섞어 마셨다.

 

고대 그리스에는 남성 중심의 연회인 '심포지엄'이 있었다. 심포지엄에서는 사회자인 심포지아크가 대화의 주제, 연주해야할 음악의 유형, 무언극이나 춤의 종류 등을 결정하였다. 플라톤의 향연에는 사람들이 모여 포도주를 마시며, 담론을 즐기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2) 로마시대 (BC 510-AD 476)

로마시대의 주택은 크고 안락하였으며, 상류층 주택은 방마다 용도가 달랐다. 가족끼리 식사할 때는 세나티오라는 작은 방을 이용했고, 부유한 가정에는 트리클리니움이라는 넓은 파티용 방이 별도로 있었다. 여기에는 3-9개 혹은 그 이상의 1-2인용 침상이 있고, 9명 이내로 모여 정찬을 즐겼다. 디너파티는 로마시대의 주요 행사였는데, 손님은ㅇ 카우치에 기대앉아 이동식 원형 테이블 위의 음식을 먹었다.

 

로마인은 하나의 커다란 테이블 주변에 침대를 U자 형태로 배치하였다. 그리스인의 1인용 침대에는 낮은 등받이가 있고, 쿠션에 기대면 옆으로 누운 사람도 필요에 따라서는 양손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인은 침대 위에서 항상 한쪽 팔꿈치를 붙여서 몸을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식탁에 놓이는 음식의 형태도 한정될 수 밖에 없었다.

 

로마인의 식사나 요리 방식의 기본 특징은 그리스인과 다를 바 없었다. 여전히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었으며, 식사는 각 코스별로 식탁 위에 차린 후 U자형의 열려 있는 부분의 끝에서부터 식탁째 서빙되었다. 식사가 끝나면 식탁이 치워지고, 미리 차려진 다음 코스의 식탁이 들어왔다.

 

로마시대의 여성들은 연회에 참여할 수 없었으며 식사 중에는 항상 음악이 흘렀다. 상차림이 끝날 때마다 막간에 악기 연주, 곡예, 흥겨운 놀이나 묘기 또는 복권 추첨 등이 마련되었으며, 이러한 놀이문화는 중세에도 계속 이어졌다.

 

 

(3) 중세시대 (BC 476-AD 1450)

중세의 만찬은 천천히 음미하며 즐기는 그리스-로마 음식문화 전통에 기초를 두었다. 고위 성직자들, 대영주와 왕이 개최하는 만찬에 악사와 광대가 등장했고, 때로 음유시인이 초대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춤을 즐기면서 대형 은제식기에 화려한 꽃으로 장식된 산해진미를 만끽하였다.

 

테이블은 목판을 가대위에 놓은 단순한 것으로서, 식사 때마다 조립하여 사용하고 식사가 끝나면 분해하였다. 집주인이나 손님의 신분이 높은 경우는 별도의 테이블에 앉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주인이 손님들과 합석하여 한가운데 앉았다.

 

중세에는 식사 시 여성들의 역할이 확대되었다. 궁정시대에는 숙녀들도 식탁에 함께 앉기 시작하였다. 남녀가 같이 식사를 하면서 예의범절이 생겨났다. 식사할 때 손을 씻어야 하고, 세 손가락으로 식사하고, 음료를 마시기 전에는 입을 닦아야하는 등의 예절이 그것이다.

 

(4) 르네상스시대 (1450-1643)

르네상스시대의 상류층에서는 '식탁의 르네상스'라고 불릴 만큼 현란한 식도락문화가 꽃을 피웠다. 요리는 단지 허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라 '진정한 예술'이 되었다. 프랑스에 시집 온 이탈리아 메디치가의 카트린은 대식이며 미식가였다. 그녀는 프랑스 궁정 예절이나 식사 예법을 모두 우아한 '이탈리아식'으로 고쳐나갔다. 이것은 요리 내용이 구체적으로 변했다기보다는, 아름다운 도기나 우아한 포크의 사용 등 식탁에서 쓰이는 도구나 장식물 및 식탁 예절이 훨씬 정교하고 복잡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16세기 식사 양식의 특징은 식사 뒤에 나오는 '코라시온'이었다. 코라시온은 설탕 절임한 과일, 건조한 과일, 생과일, 단 비스킷 등을 수북이 담은 화려한 식사 양식이다. 이러한 요리의 대부분은 식탁 위에 세팅되면 각자 자유롭게 가져다 먹었다.

 

극히 소수의 사람들이 식사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개인 컵을 소유할 수 없었다. 음료를 마시고 싶으면 컵 담당 하인에게 신호를 보내고, 하인은 식기 선반에서 컵을 꺼내 음료를 채워 그 사람에게 가져갔다. 다 마시면 컵을 닦아서 다시 식기 선반에 올려놓았다.

 

식사할 사람들이 손을 씻은 후 그 집의 주인과 초대 손님들이 먼저 자리에 앉으면, 마지막으로 남은 가족들이 앉았다. 전원이 착석하면 우선 소금이 식탁 위에 오르고, 나이프,국자,빵이 나온 뒤 음식이 운반되었다. 주요리 식사를 마치면 음유시인이 등장하고, 그들의 연주가 끝나면 또 다른 포도주와 음식들이 추가로 식탁에 올랐으며, 마지막에는 과일이 차려졌다.

 

15세기 초에 림뷔르흐 형제가 그린 <베리 공작의 귀중한 성무일과서> 중 1월의 장면에는 신년을 기념하는 호화로운 연회장면이 그려져있다. 그림 왼쪽의 금으로 된 식기는 공작의 재력을 보여준다. 연회는 궁정의 위계질서를 보여주는 정치적인 행사였다. 군주의 연회는 권력의 과시와 신하와의 주종관계를 강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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